"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원효는 불교가 융성했던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개성이 강한 승려 일 것입니다.
스스로 파계 했던 중임에도 고승으로 이름을 남겼고, 불교 대중화의 선구자이면서 불교 사상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죠.
원효도 30대 때는 당시 많은 승려들이 그러했듯 당으로 유학을 떠나 선진불교를 익히려 했습니다. 의상과 함께 당으로 가던 길에 서해안의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밤이 늦어 한 토굴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죠. 원효는 자다가 목이 말라 주변을 더듬었는데, 마침 바가지에 물이 담겨 있어 시원하게 마셨습니다.
그런데! ! !
아침에 보니 자신이 마신 물이 해골에 담긴 더러운 물이 아닌가! 원효는 기겁을 하며 토해냈습니다.
그런데 문득 깨달았죠.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
원효는 의상 혼자 당으로 떠나보내고 자신은 가던 길을 되돌렸습니다. 당 유학을 포기한 원효는 관심을 저잣거리로 돌렸습니다. 당시 신라의 불교는 귀족 중심의 종교에 머물러 있었는데요.
원효는 천민이나 농민과 어울리며 이들에게도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원효는 파계를 하게 됩니다.
무열왕의 과부가 된 딸 요석공주와 관계를 맺은 것이었죠.
원효가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련다" 란 노래를 부르고 다니자, 무열왕이 이를 듣고 '귀부인을 얻어 아들을 낳겠다는 생각이로구나'라고 해석하여 요석공주를 만나게 한 것입니다.
원효는 요석공주에게서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들이 이두를 고안한 신라의 대학자 설총이 됩니다.
아들을 낳은 후 원효는 스스로 소성거사라 부르고 저잣거리에서의 포교를 더욱 활발히 하게 됩니다. 이때 원효는 우연히 만난 광대들에게서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박에는 '일체무애인(집착이 없는 자유인)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원효는 '무애'란 이름의 도구를 만들고, <무애가>를 퍼트렸습니다. 그는 무애가에 무애춤도 곁들여 추며,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에게 포교활동을 하였습니다. 무지한 이들도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구절만 외면 죽어서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는 원효의 포교로 많은 이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외기 시작했죠. 원효의 포교로 계속되는 삼국전쟁에 지쳐 있던 일반 민중에게 희망과 위안을 안겨 주었답니다.
원효는 불교 대중화와 함께 저술에도 전념해 150권이 넘는 책을 지었습니다. 그는 당시 갖가지 교리와 주장이 난무하고 이론적 대립이 극심했던 신라의 불교계에 '화쟁사상'을 주창하여 갈등과 대립의 논리를 하나의 근원으로 조화롭게 통일시켰습니다. 그의 불교사상은 심오하면서도 독창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 불교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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