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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서울]서울 경복궁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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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빵맨입니다.

오늘은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우리의 유명한 경복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정궁이자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입니다. 하지만 경복궁은 한반도에 지어진 도성 중 예외적인 형태의 건축물인데요.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이어진 궁궐이나 대규모의 건축물이 지형에 의존하여 비교적 자유롭게 만들어진 데 반해 경복궁은 중국의 전통적인 도성 설계를 따랐다고 합니다. 평지를 선택하여 땅을 고르고 근정전을 중심으로 각각의 건축물이 사각형 형태로 퍼져 나가듯 공간을 구성했는데, 이와 유사한 건축물은 한반도에 없다시피 합니다. 이성계는 여러 유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천도를 추진했고, 결국 정도전이 새 나라의 수도 건립을 담당하게 됩니다. 정도전은 중국 고대의 관제를 기술한 책인 주례의 내용을 바탕으로 도성을 설계하려 했는데 이상적인 유교 국가의 상징으로 수도를 건설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경복궁은 '전조후침', '좌묘우사' 의 원칙을 따릅니다. 즉, 근정전을 기준으로 앞쪽에는 관리들이 일하는 공간이 주를 이루고, 뒤쪽에는 왕과 왕실 가족의 공간인 첨전과 후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 경복궁의 왼편에는 종묘, 오른편에는 사직단이 있는데 이러한 방식도 고대 중국의 예법을 따른 것이죠. 초기 경복궁은 침전보다는 편전, 왕과 신하들이 국정을 논의하고 업무를 수행하는 공간이 우세한 경향을 띠었습니다. 초기 경복궁은 오늘날과는 달리 750칸 정도로 소박한 규모였다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이를 9천여 칸으로 복원을 하고 왕실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복원을 해서 건축의 규모가 차이가 나게 됩니다.


경복궁은 이성계의 의지와 정도전의 노력으로 탄생한 공간이지만, 세종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세종만이 유일하게 평생 경복궁에서 성실하게 집무하면서 유교적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였죠. 이에 비해 대부분의 국왕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집무를 보았다고 합니다. 또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광해군은 다른 궁궐을 열심히 복원했지만 경복궁 재건은 꺼리는 등 오랜 기간 버림을 받았습니다...


경복궁은 일제 강점기 때 또 다른 수난에 직면을 하게 되는데요 조선 총독부 청사가 경복궁을 가로막는 형태로 지어졌고 편의에 따라 일부 건물을 헐어버렸다고 합니다; 다행히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총독부 건물이 철거됐고 이보다 앞서 경복궁 복원 작업이 진행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되 찾을 수 있었습니다!


참 많은 역사를 안고 있는 경복궁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다음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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